1877년 3월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공식 문서.


근대적 지적 편찬 작업을 추진 중이던 일본 내무성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地籍)에 포함시킬지의 여부에 관해 당시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에게 질의서를 제출하였다. 
태정관은 과거 외교문서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내무성에 하달하였다. 태정관지령은 그 하달 공문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내무성의 주도 하에 근대적 지적 편찬 작업을 추진 중이었고, 이의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관할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 참사(島根縣參事) 사카이 지로(境二郞)는 1618년부터 1695년까지 약 78년간 돗토리번(鳥取藩)의 상인 오오야 규에몽(大谷九右衛門)과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가 구 에도막부(江戶幕府)의 허가를 받아 매년 
다케시마(竹島)’로 건너가 이를 개척한 경위와 함께, ‘다케시마 외 일도(竹島外一島)’의 약도를 첨부하여 이 두 섬을 시마네현의 관할구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의서를 내무성의 최고책임자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제출했다. 
여기서 ‘다케시마’는 울릉도, ‘외 일도’는 에도막부 시대에 도해(渡海)한 ‘마쓰시마(松島)’ 즉 독도를 지칭한다.



이에 대해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쳐 당시의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외교교섭 관련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고, 
동시에 시마네현이 제출한 문서를 비교 검토한 후 ‘다케시마 외 일도’ 두 섬은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 문제 처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내무성은 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음해인 1877년 3월 17일 당시 국가 최고 기관인 태정관의 최고 책임자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게 최종 판단을 의뢰했다. 
이에 따라 태정관 조사국은 자체 심사를 거쳐 내무성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3월 20일 “다케시마 외 일도는 본방[일본]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안을 작성하여 태정관에 제출하였다. 


지령안은 이와쿠라의 주재 하에 내무성, 외무성, 사법성, 대장성 등 각 성의 최고 책임자 7명이 참석하는 태정관 회의에서 결재가 이루어졌고, 3월 29일 정식 지령문으로서 내무성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4월 9일에는 내무성이 이를 다시 시마네현으로 하달하여 두 섬을 관할 지역에 포함시키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태정관지령은 사실 관계에 대한 치밀한 검토의 결과 당시 일본정부 스스로가 울릉도와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공식문서인 것이다.


일본의 태정관지령은 직접 조선과의 교섭 과정을 다룬 외교문서나 조약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이 외교 및 법제적 상황을 검토한 결과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는 땅임을 명시한 공문서이다. 


따라서 이는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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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관련링크.

2017. 12. 22. 18:43 from DOKDOis.COM

*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


* 경상북도 사이버독도.


* 독도 박물관.


* 독도의 진실.


독도 관리사무소.


* 독도수호 국제연대


* 독도 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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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연표.

2017. 7. 3. 16:25 from DOKDOis.COM
512신라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 우산국을 정벌
신라 지증왕 13년 아슬라주(阿瑟羅州: 현재의 강릉)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에 복속됨.
참고문헌 :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4 智證麻立干 13年6月條, 『三國史記』卷44 列傳4 異斯夫條,
『三國遺事』卷2 智哲老王
1145『삼국사기』 편찬
512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었음을 서술.
원문: "지증왕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1417울릉도 주민 쇄환(刷還)
고려말~조선초 왜구가 노략질을 자행하자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1417년 (태종17년) 조정은
무릉도(武陵 : 울릉도)에 주민의 거주를 금하고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게 하는 쇄출(刷出)정책을 실시함.
참고문헌 : 『太宗實錄』 卷33, 34.
1435「신찬팔도지리지」편찬)
1432년(세종 14) 1월에 편찬된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서.
독도에 대한 내용이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그대로 실림.
1454『세종실록』「지리지」 편찬.
원문: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에 있다."
의의: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가 별개의 섬이고,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은 날에만
보이는 유일한 섬은 독도임을 감안할 때, 우산도가 곧 독도이고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함.
1625일본, 울릉도 도해면허
일본 도쿠가와 (德川)막부, 호키국(伯耆國: 돗토리번(鳥取藩)의 일부) 태수(太守)에게
요나고(米子)의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양가(兩家)에 대해 울릉도 도해(渡海)를 면허.
1693안용복 일본으로 납치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 일본 오야(大谷) 선원들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임을 주장.
1694수토(搜討)제 실시
장한상(張漢相), 울릉도를 조사하고 삼척으로 귀환
정기적으로 울릉도를 수토(搜討)하기로 결정 
※ 울릉도 수토제도(1697~1894): 안용복 사건 이후 3년에 한 차례씩 관원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살펴보도록 한 제도
1696일본, 울릉도 독도 조업금지, 안용복 2차 도일(渡日)
일본 도쿠가와(德川) 막부,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대마번(對馬藩)에 전달
- 안용복(安龍福) 등 울릉도에 출어(出漁)한 일본 어선을 추격하여 자산도(독도)까지
따라가그들을 쫓아냄.
1849Rochers Liancourt(Liancourt Rocks)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Liancourt)호, 독도를 발견하고,
'Rochers Liancourt(Liancourt Rocks)' 로 명명
1870일본,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자인
일본 외무성 관리 (佐田白茅 등),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죽도(울릉도)와 송도 (독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 있는 전말" 
※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이 지시한 조사사항에 대한 복명서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기록
1877일본, "울릉도, 독도는 조선땅" 공식적으로 선언
일본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지적 편찬상 문제가 된 울릉도 외 1도(독도)가 일본령이
아님을 내무성(內務省)에 지령
- 태정관 지령: "품의한 취지의 죽도(울릉도)외 1도의 건에 대하여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1882울릉도 검찰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李奎遠) 일행, 울릉도를 검찰
1900대한제국 칙령 제41호 공포:울릉도(독도) 행정구역 편제
칙령(勅令) 제41호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改稱)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한 건(件)'을 제정 반포, 이 칙령 제2조에 울도군(鬱島郡)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전도(鬱陵全島) · 죽도(竹島)와 함께 석도(石島, 독도)를 규정
참고문헌: 禹用鼎의 『鬱島記』 『高宗實錄』 卷40, 『官報』 제1716호 光武 4年 10月 27日.
1905일본의 독도 강탈
일본, 1905년 2월22일 시마네현 고시 (島根縣告示) 제40호를 통해 소위 독도의 영토 편입을 고시
1906시마네현 민 · 관 시찰단, 울릉도 상륙
시마네현 민 · 관 시찰단이 울릉도에 상륙, 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알림.
- 강원도 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李明來), 의정부 참정 대신에게 울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를 재보고
- 의정부 참정대신 , 강원도 관찰사에게 지령 제3호로 독도의 일본 '영지지설(領地之說 )' 을
부인하고,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다시 조사 보고할 것을 지령
1910한·일 강제 병합
한·일 강제 병합
1945광복
광복
1946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677호
연합국총사령부는 각서 제677호를 내려 일본에서 제외되는 섬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언급
1951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모든 권리, 권원, 청구를 포기하는 지역에
제주도 , 거문도, 울릉도를 대표 적으로 예시
1952평화선 선포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을 공포(일명 평화선)
-일본 정부 , 평화선 선포에 항의함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부정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옴.
1953독도 경비
1953년 4월부터 울릉도 거주민을 중심으로 간헐적인 독도 경비를 실시하다 1954년 4월 의용수비대
확대(33명) 개편
1953~65한·일 간 독도에 대한 정부의 견해
한·일 간 독도에 대한 정부의 견해가 구술서의 형태로 왕복, 일본측 총4회, 한국측 총3회에 걸쳐 진행됨.
1954독도등대 설치
1954년 8월 독도등대를 설치 점등하고, 세계 각국에 등대설치 사실 통보
1954(1962)본 정부, '독도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제의
한국 정부 , 일본 정부의 '독도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제의를 거부
1956경찰, 독도경비임무 인수
1956년 12월 독도 의용수비대의 경비임무를 국립경찰(울릉경찰서)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1965한·일 기본관계조약 체결
독도문제는 제외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
1982독도 '천연기념물 336호' 지정
1982년 11월 16일 동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의 대집단이 번식하여
독도를 천연기념물 336호 ‘독도 해조류번식지’로 지정하였으며 1999년 12월 독특한 식물들이 자라고,
화산폭발에 의해 만들어진 섬으로 지질적 가치 또한 크고, 섬 주변의 바다생물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매우 특수하여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을 변경함
1997독도 ‘특정도서 지정’ 관리
1997년 12월 13일 제정한 ‘독도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존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5447호) 및
2002년 8월 8일 환경부 고시(제2002-126호)에 의해 독특한 자연환경과 해양생물이 다양하고
풍부한 독도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도서로 지정
1998한·일간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
1999천연기념물 제 336호 독도천연보호구역
독도를 '천연기념물 제 336호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 변경
2000독도리 행정구역 승격
2000년 4월 7일 울릉군 조례 제1395호로 독도리가 행정구역으로 승격됨에 따라 독도의
행정구역이 종전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42~76번지에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변경
2005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설치
일본 시마네현, 소위 '죽도의 날' 제정
우리 정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설치
2006동북아역사재단 출범
-
2007일본 시마네현 소위 '죽도문제연구회',『최종보고서』제출
-
2008일본 시마네현 소위 '죽도문제연구회',『최종보고서』제출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 소위 "죽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 개의 포인트 게재
7.14, 일본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명기
8.14,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개소

출처 : 국립해양 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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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증거.

2017. 7. 3. 16:22 from DOKDOis.COM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국 역사에 분명하게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이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해역을 무대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신라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국 역사에 분명하게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여진족과 왜구의 침범

울릉도·독도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강역내에 존재하였다.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우산국은 왕건에게 래조(來朝)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다.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교류를 통해 번성해 갔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의 우릉성 조사보고에서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 등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수준높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대 이후 급격히 황폐화 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요인은 여진족의 침입이었다.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의 피폐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해지역)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고려사』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덕종 원년(1032)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羽陵城主 遣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산국의 피폐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 후 본토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던 듯 하며, 이후 우산국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여진족의 침입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인종 19년(1141)에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주민 이주와 관부설치가 가능한 지를 조사하였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개발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고종 30년(1243), 울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육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 혹은 해도(海島)로 이주시킨, 중앙정부의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불력(佛力)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경(江華京)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강화경판고려대장경(江華京板高麗大藏經, 일명 八萬大藏經)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풍파로 인한 익사자가 많이 발생함으로써 이주정책은 결국 철폐되고 말았지만, 이 시기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 이후 원의 대목(大木)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려정부는 울릉도에서 벌목을 행하였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벌목으로 현지민들의 고초가 심했으며,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토로 도망했으리라 생각된다.

원간섭기 동안에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충목왕 2년(1326) "동계의 우릉도인이 래조(來朝)하였다 (東界芋陵島人來朝)"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동계(東界)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원으로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우릉도(芋陵島)는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독도가 고래로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이 지역은 고려의 통치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속적인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은 어려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되어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 7월 "왜가 무릉도에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문헌상 우왕대의 기록만 보이지만 왜구의 이 지역에 대한 침구는 충정왕대부터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며, 주민의 거주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결국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개발은 신왕조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주민의 이주보다는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일대를 통해 울릉도·독도지역은 고려의 영토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고려시대에 작성된 자료들은 후대에 전승되어, 조선초 『고려사』 지리지를 편찬할 때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명기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 지역에 대한 정책입안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수토정책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여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搜討政策)으로, 태종조부터 고종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사에서 주민의 이주정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수토정책 역시 이러한 이주정책의 하나였다.

조선초기에는 여진족의 위협이 사라졌고, 고려후기 이래 집중된 왜구의 침구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으므로 동해안 외곽 방어선으로서의 울릉도의 기능은 훨씬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태종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방제도의 정비와, 국초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된 동북·서북면의 개척과 사민정책 등은 당시 국력의 집중을 요하는 것으로, 울릉도 및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경략과 재건은 보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국초부터 추진된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방향은 모든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동시에 고을의 통·폐합을 통하여 그 수를 줄여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굳이 울릉도에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전쟁수행, 지역개발 등에 주민 이주정책을 적절히 사용해 왔던 역사적 경험은, 조선 태종조에 많은 토론을 거쳐 울릉도에 대해 '주민의 철수와 정기적인 수토'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수토정책은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순찰을 병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부담은 계속 남는 것이었다. 때문에 섬을 비우기보다는 관부를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논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위와 같은 중앙정부의 거주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본토의 民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내왕하며 어로·채취작업을 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울릉도 등지에 대한 정기적인 순찰을 통해, 토산물 등의 현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거주민들이 발견되는 즉시 본토로 송환시켰다.수토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태종조 부터 대마도주의 울릉도 거주 청원이 있었으나, "이국인이 국경을 넘나들 경우 분쟁의 소지가 발생한다" 하여 번번히 기각되었다.이러한 수토정책이 철회된 것은 1882년(고종 19)이었으며, 1883년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면서 울릉도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다.

삼봉도

일본은 현재 우리의 옛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三峯島)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가 삼봉도로 불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많다.

삼봉도

우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삼봉도의 형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한다"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의 『전보신문(電報新聞)』 1906년 5월 27일자 기사에는 러일해전의 전장(戰場)으로 독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지형을 설명하면서 동도와 서도 그리고 관음도(觀音島)라 하여 세개의 섬을 열거하였다. 또한 이 신문에 실린 독도의 전경 사진에는 세개의 섬 즉, '삼봉도'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제3국의 자료를 살펴보자. 1849년 3월 독도를 목격한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는 그 항해일지에 "세개의 바위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즉, 독도의 모습을 '삼봉도'로 파악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도가 삼봉도였음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제3국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실성은 오늘날 해상에서 독도를 관망해 보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독도를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독도가 '삼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진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한국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는 울릉도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우리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정확했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다.

안용복의 활약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독도등지에서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1613년(광해 6)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공문을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등지에 대한 왕래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키슈(伯耆州) 요나고(米子)의 상인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침구f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은 종종 충돌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야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쳐 두 나라간 울릉도·독도 영유권에 대해 외교문서가 오가는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조정의 강력한 대응으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과정과 결과가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17세기 말엽에 양국 최고 통치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며 두 섬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것과,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당시 일반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정에서 일본에 보내어진 서계에는 한결같이 '울릉도와 독도가 지금은 비워져 있지만 옛부터 내려온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고, 1차 충돌 후 납치되어 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에, 에도 막부에서는 면밀한 검토 끝에 '울릉도(竹島)와 우산도(于山島-松島 :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써 주었다.
2차 충돌시 일본인들은"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라 칭하였다)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에, 안용복은"송도는 자산도(子山島: 당시 조선에서는 독도를 于山島로 칭하였는데 '于'자가 '子'·'干'·'千'자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는 대답에서 당시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은 안용복 사건이 울릉도에 국한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점을 볼 때,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17세기 말엽에 독도의 영유권논쟁이 종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 사건이 종결된 이후 그 결과가 양국간 영토의식과 그 경계 획정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울릉도·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였다. 지금까지의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2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인 순찰을 행하게 되었다. 사정에 따라 격년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평균 5년내에 1회씩의 순찰은 한말 울릉군수가 파견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결과로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이다.

시마네헌고시 40호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러시아함대를 감시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본토와 연결된 전선망을 설치하는 동시에 망루를 세웠다.
일본군부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에서는 1905년 1월 28일 각의결정 후,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40호'를 통해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위 고시 40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崎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이 불법 편입사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확립된 후인 1906년 음력 3월 5일에야 대한제국에 알려졌다.

이 고시는 현재 일본에 의해 독도의 편입이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입각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편입이라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즉, "독도는 1905년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었으므로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할 경우 영토획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국제법상 요건을 충족시켜 시마네현(도근현)에 편입시킨 합법적인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독도가 강제편입되어 있었던 시마네현에는 지금도 "다케시마(竹島)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입간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고시는 법적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고시로 존재하지 않은 회람(回覽)에 불과한 것이었다.

첫째, 독도는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 아니었다. 
독도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할 때, 이미 그 관할 구역(石島: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돌섬'의 한자식 표기)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군부가 독도에 대한 불법 영토편입을 추진하면서 표면에 내세운 일본 어업가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은 원래 중정양삼랑이 독도근해의 독점어업권을 대한제국으로부터 빌리기 위해서 일본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과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에 의해서 대하원(貸下願)에 '리앙꼬島 영토편입'이 추가되어, 대한제국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청원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한국정부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것이며,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갖게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편입을 반대하였다.
즉, 당시 영토편입 당사자인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둘째, 선점(先占)의 경우, 무주지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게 되어있는데, 일본은 그러한 절차를 편법으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편입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일본은 다른 도서(島嶼)의 경우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각의(閣議)를 거쳐 해당 관공서와 신문에 고시해온 관행(慣行)과 달리 유독 독도의 경우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는 당시 일본의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고시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관보(官報)에 조차도 1905년 6월 5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시에 명시된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현재 이 고시의 원본은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현령(島根縣令)]이나 [시마네현훈령(島根縣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문건에는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로써 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回覽)'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일본의 합법성 주장과는 달리 당시 독도 영토편입이라는 것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했던 명백한 침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는 러일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에서 불법 침탈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억지와는 반대로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오히려 역사의 진실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될 뿐이다.

일제의 수로지

일본해군이 발행한 {수로지(水路誌)}는 정부의 공식 간행물로 공신력이 높다. 그런데, 광복이전 일본의 수로지에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한국의 영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도박물관에는 1945년 8월 광복이전의 일본 수로지로 ①{환영수로지( 瀛水路誌)}(1883년판·1886년판), ②{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1894년판·1899년판·1907년판), ③{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1911년판·1920년판), ④{조선연안수로지(朝鮮沿岸水路誌}(1933년판), ⑤{조선연안간이수로지(朝鮮沿岸簡易水路誌)}(1945년판)가 전시되어 있다.

위 수로지 ①에는 독도관련 내용이 '[リヤンコ-ルト]列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국일반정세(朝鮮國一般政勢)]의 항목에 들어있다. ②의 {조선수로지} 1894년판(255∼256쪽)과, 1899년판(263쪽)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있다.1905년 [시마네현고시 40호]이후 발간된 {조선수로지} 제2개판에는 명칭이 '竹島(Liancourt rock)'로 바뀌어 있는데, […한국인은 이를 獨島라 쓰고, 일본어부는 리양꼬島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이외 위 수로지들은 광복직전인 1945년 6월에 발간된 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되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원래 조선의 영토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일본 수로지의 내용은 광복이후 발간된 1952년판 {조선남동안수로지(朝鮮南東岸水路誌)}에서 부터 변화된다.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게 된 일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도를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이상과 같은 일본 수로지의 내용을 통해서 광복직전까지 일본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고 있었으며, 현재 일본의 독도영유권의 주장이 교활한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다.

미국포경선의 항해일지

독도를 최초로 발견한 서양배는 과연 프랑스의 포경선 Liancourt일까? 
지금까지는, 1849년 1월 27일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끌'이 독도를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당시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독도는 소위 '리앙꼬르岩'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Liancourt號보다 9개월 정도 앞선 1848년 4월 17일 미국의 포경선 Cherokee號가 독도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즉, Cherokee호 선장 제이콥 L.클리브랜드의 항해일지 4월 16일자에 의하면 終盤에 two small islands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개의 작은 섬 그것은 바로 독도이다. 당시 포경선들이 사용하고 있던 海圖에는 독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체로키호는 4월 17일 오전 4시에서 12시 사이에 독도를 발견하였다. 이는 독도발견에 관한 서양최초의 기록이 된다. 이후, 고래잡이를 위해 동해를 찾은 미국의 포경선들은 당시 해도에 실려있지 않은 섬, 독도를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서양인의 눈에 독도는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Moctezuma호는 1849년 3월 2일, 3일 9일 울릉도와 함께 pinnacle rock을 보았다고 항해일지에 적고 있다. 독도의 정상이 뾰족하기에 pinnacle rock 즉 첨탑岩이라 불렀을 것이다.

Moctezuma호는 1849년 3월 2일, 3일 9일 울릉도와 함께 pinnacle rock을 보았다고 항해일지에 적고 있다. 독도의 정상이 뾰족하기에 pinnacle rock 즉 첨탑岩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 3월 18일 William Thompson호는 울릉도 동남쪽 40마일쯤에 어떤 해도에도 없는 3 Rocks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세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독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는 성종대에 독도를 三峰島로 불렀던 우리의 기록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Cambria호는 1849년 4월 28일에 울릉도를, 29일에는 海圖에 실려있지 않은 the small islands를 보았다고 적고 있다. 더욱이, 이 일기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그림까지 그려두고 있다. 이는 종래 알려져 있던 프랑스의 해군함정 콩스탄틴호가 1856년 그린 독도그림이나 러시아의 군함 팔라스호가 1857년 그린 독도그림 보다 7∼8년 앞서는 최초의 독도그림이 될 것이다.
Henry Kneeland호는 1853년 4월 18일 울릉도와 seal rock을 보았으며, seal rock에 상륙하여 물개 7마리를 잡았다고 쓰고 있다. seal rock 즉 물개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독도에서 잡았다는 seal(물개)은 강치(海驢)일 것이다. 이 강치를 물개로 오인한 것이었다.

Florida호는 1857년 3월 27일 Dagelet Rock(울릉岩)을 보았다고 하며, 4월 3일에는 울릉도는 뒤쪽에 울릉岩은 앞쪽에 있었다고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4월 7일에는 울릉도와 울릉岩의 중간쯤에 배가 있었는데, 모두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Dagelet Rock(울릉암)은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 기록은 독도가 울릉도(Dagelet Island)의 子島 혹은 屬島임을 시사한다. 즉, 새로이 발견한 독도를 Dagelet Rock이라 이름지음으로서, 플러리다號는 독도를 울릉도(Dagelet Island)의 屬島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860년 4월 11일 Florida호는 울릉도를 보았으며, Asses Ears라 불리는 바위를 지났다고 한다. 여기서 the rocks called Asses Ears(당나귀의 귀라 불리는 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동도와 서도로 솟아있는 형상이 마치 나귀의 두 귀처럼 보였기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또한 문맥상에서 보아 이전에도 그렇게 불렀던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항해일지는 독도가 울릉도와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영토임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 될 것이며, 서양최초의 독도발견이 리앙꼬르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인식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광복과 독도의 회복

1945년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2차대전이 종전된 후 연합국은 1945년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여 통지하였는데 이를 '맥아더 라인'이라 한다. 이 선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령에 귀속되어 있다.
1946년 1월 29일 일본정부에 하달된 연합군 최고사령관 훈령 677호(SCAPIN No 677) 3항에는 추축국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竹島)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6년 6월 22일의 훈령 1033호에는 "일본의 선박과 선원은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이 섬에 대한 여하한 접근도 금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은 전 세계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우리 정부의 행정 및 군사력이 독도에 미칠 수 없는 공백을 틈타 독도에 다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52년 1월 18일 우리 정부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발포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이며, 그 주변 12해리가 우리의 영해임을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동월 28일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박 구상서를 우리 정부에 보내 옴으로써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은 다시 불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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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쇼군은 공식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시켰다.
이 문서들은 독도(가끔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 또는 다케시마)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1693년 첫 번째 안용복 사건이 개입된 울릉도 분쟁 이후에, 일본은 다케시마(울릉도)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독도)의 영토 소유권에 관해 조선과 교류를 시작한다. 이 페이지 문서들은 일본인 기록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막부의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케시마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대한 명확하게 의심되는 부분 그리고 1695년 막부와 인바슈 간의 대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들 문서들에서 우리는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일본의 영토일부가 아니라, 조선 영토라고 간주한다고 결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부분의 막부기록 – 회답양식은 아래 부분과 같이 나타나 있다.

쇼군이 인바슈에게 질문한 내용(일본글) #1

この文書たちは独島(Liancourt-竹島)に対する歴史的所有権で非常に重要なのだ。1693年一番目安竜福事件が介入された鬱陵島紛争以後に、日本は竹島(鬱陵島)そして松島(独島)の領土所有権に関して朝鮮と交流を始める。このページ文書たちは日本である記録で鬱陵島と独島に関する幕府の立場をよく表現している。これは竹島そして松島に対する明確に疑心される部分そして1695年幕府と因幡州の間の返事をよく現わしてくれている。これら文書たちで私たちは幕府が鬱陵島と独島は皆日本の領土一部ではなく、朝鮮領土と見做すと決め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問題部分の幕府記録–回答様式は下の部分のように現われている。
막부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인바슈의 회신(일본글) #2
幕府への鳥取藩の回答(元禄8年12月25日)

一竹島は、因幡・伯耆に附属してはおりません。伯耆国米子町の人、大谷九右衛門、村川市兵衛と申す者が、海を渡って漁をしているのは、松平新太郎(池田光政)が(因幡・伯耆を)領国としていた時( 1617 ~1632 年)、御奉書(幕府老中が発行した文書)によってご指示があったと聞いております。それ以前に渡海していたこともあるように聞いておりますが、そのことについては知りません。
一竹島の周囲は、約8~9里程度とのことで、人は暮らしておりません。
一竹島へ猟採に行く時期は、2月、3月頃、米子から船出します。毎年行っております。あの島で蚫・みち(アシカ)の猟を行います。船数は大小2艘で行きます。
一4年以前申年に朝鮮人があの島へやって来た時船頭たちが朝鮮人と逢ったことはその時
ご連絡しております。翌酉年も朝鮮人がきていましたので、船頭たちは逢い、朝鮮人2人を連れ、米子へ帰りましたが、その時もご連絡し、長崎へ送りました。戌年は、難風に遭い、あの島へ着岸しなかったことはご連絡しております。今年も、渡海しましたが、異国人が数多く見えたため、着岸せずに帰る際、松島で蚫を少々採りました。右のことはご連絡しております。
一申年に朝鮮人がやって来た際は、11艘の船のうち6艘が難風に遭い、残り5艘があの島に留まり、53人がいました。酉年は、船3艘、人が42人来ておりました。今年は、船数が多く、人も多く見えました。着岸しなかったので、はっきりしたことはわかりません。
一竹島、松島、その他、両国(因幡・伯耆)に附属する島は、ありません。
《この間、幕府から鳥取藩に対し、「松島」に関する問い合わせがあったと考えられる》



#1 번역.

1. “…다케시마(울릉도)가 언제부터 이나바 주(因幡)와 호키 국(伯耆)의 일부로 관할되었는가? 1632년 전인가 후인가? 언제 선조들이 땅을 받았는가..?”

2. “…다케시마 (울릉도)의 크기는 얼마인가? 사람들은 살고 있는가..?”

3. “…다케시마 (울릉도)에 해산물을 채취하러 떠나는 날은 언제인가? 그들은 매년 가는가 또는 가끔 가는가? 무얼 사냥하는가? 거기 가는 배는 많은가..?”

4. “…3-4년 전, 한국인들이 거기서 사냥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 두 사람은 볼모로 잡았다. 한국 사람들은 그 전에도 거기에 갔었는가? 아니면 그들은 2년간 밖에 오지 않았는가..?”

5.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거기에 있었는가..?”

6. “…작년에 간적은 언제인가? 얼마나 많은 배들이 거기에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사람들이 거기에 있는가..?”

7. “…두 지역 관할 안에 다케시마(울릉도) 외의 다른 섬도 있는가? 이들 두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어업을 하고 섬에 모여 있는가..?”



#2 번역.

1. “…다케시마는 이나바(因幡)국 또는 호키(伯耆)에 속하지 않는다. 松平新太(池田光政)가 호키의 영주였을 때(1617~1632) a,b,c, (일본인)가 바다를 건너 어업을 하였다. 나도 역시 듣기로는 정부 관리들(막부)에 의해서 공식문서 발행을 통하여 허가된 것으로 들었다. 나도 역시 이들의 활동이 그 시대에 행해졌다고 들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2. “…섬은 둘레가 약 8 또는 9리(36km)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

3. “…사냥과 채취기는 2월 내지 3월에 그리고 요나고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매년 가는데, 전복을 따고 그리고 물개를 잡는다. 그들은 크고 작은 두 배를 이용한다…”

4. “…4 년 전, 조선 사람들 섬에 와서 우리 어부들을 만났는데 이것은 그때 기록된 것이다. 다음해, 조선 사람들 계속 와서 우리 어부들과 대립되어 두 사람을 요나고로 데리고 왔으며 그것이 기록되었으며 그들은 나가사키로 보내졌다…”

5. “…다음해 바람이 거세어서 그 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해에, 도해가 다시 행해졌으나 많은 외국인들이 보여서 따라서 그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섬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서 전복을 잡았다…”

6. “…4 년 전, 조선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11척의 배를 타고 왔다. 6척은 거센 바람을 맞았고 그리고 나머지 5척의 배는 섬(다케시마)에 머물렀는데 53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해 42명의 사람들이 3척의 배로 왔다. 이 해에, 많은 배들과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관심이 거의 없어서 나머지는 잘 아는바가 없다…”

7. “…다케시마(울릉도)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독도) 그 외에 두 현에 속하는 다른 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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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

2017. 7. 3. 16:08 from DOKDOis.COM

아래는 18 세기 한국의 그림이다. 

이 지도는 울릉도 그리고 우산도(독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산도는 올바른 위치인 동쪽이 아니라 서쪽 위치에 그려져 있다. 

붉은 선은 울릉도에서 울진으로 그어져 있음을 주의해 보라. 

이 선은 “바닷길 2일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울릉도에 자주 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사실상, 한국인 기록에 울릉도 항해는 512 A.D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1618년 일본 시마네 무라가와 가계에서 기록된 것 보다 

1,000년 전부터 한국인은 가시적 거리에 있는 독도에 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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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지리적요약.

2017. 7. 3. 16:07 from DOKDO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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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FB-cySEZCE



Chinese

https://youtu.be/w1yw5GfeT-k?list=PLef8XpzyyipdpffbzLU59PGqMcDBMt7SM



Russian

https://youtu.be/GumYSqZKwwQ?list=PLef8XpzyyipdpffbzLU59PGqMcDBMt7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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