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3월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공식 문서.


근대적 지적 편찬 작업을 추진 중이던 일본 내무성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地籍)에 포함시킬지의 여부에 관해 당시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에게 질의서를 제출하였다. 
태정관은 과거 외교문서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내무성에 하달하였다. 태정관지령은 그 하달 공문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내무성의 주도 하에 근대적 지적 편찬 작업을 추진 중이었고, 이의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관할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 참사(島根縣參事) 사카이 지로(境二郞)는 1618년부터 1695년까지 약 78년간 돗토리번(鳥取藩)의 상인 오오야 규에몽(大谷九右衛門)과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가 구 에도막부(江戶幕府)의 허가를 받아 매년 
다케시마(竹島)’로 건너가 이를 개척한 경위와 함께, ‘다케시마 외 일도(竹島外一島)’의 약도를 첨부하여 이 두 섬을 시마네현의 관할구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의서를 내무성의 최고책임자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제출했다. 
여기서 ‘다케시마’는 울릉도, ‘외 일도’는 에도막부 시대에 도해(渡海)한 ‘마쓰시마(松島)’ 즉 독도를 지칭한다.



이에 대해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쳐 당시의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외교교섭 관련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고, 
동시에 시마네현이 제출한 문서를 비교 검토한 후 ‘다케시마 외 일도’ 두 섬은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 문제 처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내무성은 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음해인 1877년 3월 17일 당시 국가 최고 기관인 태정관의 최고 책임자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게 최종 판단을 의뢰했다. 
이에 따라 태정관 조사국은 자체 심사를 거쳐 내무성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3월 20일 “다케시마 외 일도는 본방[일본]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안을 작성하여 태정관에 제출하였다. 


지령안은 이와쿠라의 주재 하에 내무성, 외무성, 사법성, 대장성 등 각 성의 최고 책임자 7명이 참석하는 태정관 회의에서 결재가 이루어졌고, 3월 29일 정식 지령문으로서 내무성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4월 9일에는 내무성이 이를 다시 시마네현으로 하달하여 두 섬을 관할 지역에 포함시키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태정관지령은 사실 관계에 대한 치밀한 검토의 결과 당시 일본정부 스스로가 울릉도와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공식문서인 것이다.


일본의 태정관지령은 직접 조선과의 교섭 과정을 다룬 외교문서나 조약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이 외교 및 법제적 상황을 검토한 결과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는 땅임을 명시한 공문서이다. 


따라서 이는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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